[씨줄날줄] 대학교수/주병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대학교수/주병철 논설위원

입력 2011-02-28 00:00
수정 2011-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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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 사회에 꽤나 유행했던 ‘대학교수와 거지’의 공통점이란 개그가 있었다. ‘어렵지만 한번 되기만 하면 더없이 편하다.’ ‘맛들이고 나면 결코 그만둘 수 없다.’ ‘출퇴근 구애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가진 우스갯소리였다. 이 개그는 우리 사회에 비친 대학교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것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인재를 키우는 큰 스승으로, 다른 한편으로 철밥통·논문표절·도덕불감증으로 대변되는 상아탑 어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상아탑의 역사는 중국 주나라의 국학이나 기원전 387년에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원을 찾는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때 태학, 신라 때 국학, 고려 때 국자감이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대학은 중세 말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처음에는 사제들에게 교회 기도문을 읽을 정도의 초보적인 교육을 했지만 12세기 들어 학생수와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 대도시에는 수백명의 학생을 둔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 프랑스 파리대, 영국 옥스퍼드대 등이 건립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중세 유럽 대학에서 흥미로운 것은 규모가 커지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건 교수가 아니고 학생들이라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출신 지역별로 상인과 수공업자 조합조직을 본뜬 길드 조직을 결성해 교수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무능·어용 교수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고, 허가 없이 교수가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교수는 학생 대표에게 잘 가르치겠다며 충성 서약을 해야 했고, 부실한 강의에 대해서는 벌금을 물었다.

입지가 좁아진 교수들이 학생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게 콜레지아(collegia)였다. 당시 교수들은 유명한 법학자나 신학자를 제외하고는 수입이 적고 지위도 극히 불안정했다. 그래서 같은 동료의 강의 수준이 높아야 자신들의 지위가 안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콜레지아에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능력과 품위 심사를 엄격히 했다고 한다. 이 심사는 사실상 교수 자격을 따지는 절차로, 요즘 말로 ‘교수 학위’ 심사쯤 된다.

대학교수 수난시대다. 학생들이 매기는 강의평가를 공개해야 하고, 1년에 2~3개의 논문을 써서 국제 학술지 등에 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제자폭행·성추행·학력위조 등으로 잇따라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학문에만 매진하는 교수들이 매도당할까 봐 안타깝다. 현대판 콜레지아라도 만들어야 할지.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2011-02-2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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