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1921년 11월 17일자에 ‘사죄 공고’라는 제목의 광고가 실렸다. 고강(高岡·다카오카)타면 주식회사가 대판(大阪·오사카)타면 주식회사에 “귀사가 제조한 타면의 상표권을 침해했음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관대한 처분으로 용서해 달라”고 사죄하는 내용이다. 타면(打綿)이란 솜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회사는 솜을 만드는 제면(製綿) 회사였다. 두 회사 모두 일본에 본사가 있는 일본 기업인데 매일신보에 광고를 낸 것을 보면 식민지 한국에서도 제품을 판매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표의 디자인이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동전 상평통보(常平通寶)여서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아마도 돈을 상표로 쓰면 금전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뜻에서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중국, 한국, 베트남 등 근대 이전의 한자 문화권의 동전(엽전)은 모양이 비슷했다. 상평통보처럼 가운데 구멍이 나 있고 대개 네 글자로 된 명칭이 한자로 씌어 있다. 일본에도 만년통보(萬年通寶) 등 많은 동전들이 통용됐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뒤 한국의 옛 동전 디자인을 자국의 것처럼 갖다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한국 동전을 상표로 쓴 이유는 알 수 없다. 동전의 모양이나 글자가 일본 것보다 디자인이 낫다고 봐서 그랬던 것인지, 제품의 주 판매지가 한국이라서 그랬던 것인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평통보는 1633년(인조 11년)에 처음 나왔지만, 화폐로서 실패했다가 1678년(숙종 4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조돼 유통된 화폐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화폐이기도 하다. 구한말에는 당백전, 당오전에 이어 은화와 백동화, 적동화가 발행돼 상평통보와 함께 쓰였다. 일제는 침략을 가속화하면서 1902년에 제일은행권을 무단 발행한 데 이어 한일병합 후인 1914년 조선은행권을 발행, 제일은행권과 엽전을 회수하고자 했다. 그 후에도 상평통보는 특히 영호남 지역 등 지방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유통됐다. 조선총독부는 상평통보 등 엽전을 백동화로 바꿔 주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백동화는 실제 금속 가치에 비해 액면가가 높은 악화(惡貨)이기도 해서 엽전은 1920년대까지 시중에서 거래수단으로 계속 이용됐다. 일제강점기에 상평통보는 다섯 냥(500개)이 조선은행권 1원으로 통용됐는데 정식 화폐가 아니라 보조 화폐 역할만 했다. 상평통보는 광복 직전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시중에서 주고받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최근까지 흔하게 유통됐기에 수십 년 전 할머니 쌈지 속에는 줄로 엮은 상평통보가 들어 있었다.
sonsj@seoul.co.kr
그런데 그 상표의 디자인이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동전 상평통보(常平通寶)여서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아마도 돈을 상표로 쓰면 금전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뜻에서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중국, 한국, 베트남 등 근대 이전의 한자 문화권의 동전(엽전)은 모양이 비슷했다. 상평통보처럼 가운데 구멍이 나 있고 대개 네 글자로 된 명칭이 한자로 씌어 있다. 일본에도 만년통보(萬年通寶) 등 많은 동전들이 통용됐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뒤 한국의 옛 동전 디자인을 자국의 것처럼 갖다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한국 동전을 상표로 쓴 이유는 알 수 없다. 동전의 모양이나 글자가 일본 것보다 디자인이 낫다고 봐서 그랬던 것인지, 제품의 주 판매지가 한국이라서 그랬던 것인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평통보는 1633년(인조 11년)에 처음 나왔지만, 화폐로서 실패했다가 1678년(숙종 4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조돼 유통된 화폐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화폐이기도 하다. 구한말에는 당백전, 당오전에 이어 은화와 백동화, 적동화가 발행돼 상평통보와 함께 쓰였다. 일제는 침략을 가속화하면서 1902년에 제일은행권을 무단 발행한 데 이어 한일병합 후인 1914년 조선은행권을 발행, 제일은행권과 엽전을 회수하고자 했다. 그 후에도 상평통보는 특히 영호남 지역 등 지방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유통됐다. 조선총독부는 상평통보 등 엽전을 백동화로 바꿔 주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백동화는 실제 금속 가치에 비해 액면가가 높은 악화(惡貨)이기도 해서 엽전은 1920년대까지 시중에서 거래수단으로 계속 이용됐다. 일제강점기에 상평통보는 다섯 냥(500개)이 조선은행권 1원으로 통용됐는데 정식 화폐가 아니라 보조 화폐 역할만 했다. 상평통보는 광복 직전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시중에서 주고받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최근까지 흔하게 유통됐기에 수십 년 전 할머니 쌈지 속에는 줄로 엮은 상평통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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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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