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즈베크 우호증진에 나서겠다... 고려인 조형물 건립 추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한국과 수교 이전부터 양국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양국의 우호 발전을 위해 의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하겠습니다.”지난해 말 고려인으로는 최초로 이 나라 선출직 하원의원에 당선된 고려인 3세 박 빅토르(57)는 한국 언론 처음으로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연합뉴스 기자에게 ‘양국 우호 발전’을 이루는데 5년 임기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신부터 밝혔다.
그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국회에 입성해 우즈베키스탄 내 20만여 명, 전 세계 50만여 명에 달하는 고려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타슈켄트 주(州) 고려인문화협회장이기도 한 그는 선거 당시 여당인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우르타치르칙 지역에서 56%의 지지를 얻어 3명의 경쟁자를 누르고 압승했다. 특히 유권자 15만 명 가운데 고려인은 소수에 불과해 그의 당선은 더 빛났다.
박 의원은 양국 우의 증진을 위한 첫 사업으로 ‘고려인·우즈베키스탄 우정의 조형물’을 건립할 계획이다.
”1937년 스탈링네 의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되어 우즈베키스탄의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부지하며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어요. 오늘날 고려인이 여러 방면에서 한국의 도움에 감사하듯 과거 현지인이 보여준 따듯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려인을 반겨준 이 나라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우정의 조형물을 타슈켄트 시내에 세울 것입니다.”
그는 조형물에 고려인 이주의 역사를 소개하고, 앞으로도 조화롭게 살자는 내용을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한국어로 새겨 넣을 계획이다.
그는 두 번째 사업으로 ‘고려극장’ 건립을 마무리 짓겠다고 자신했다. 박 의원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고려인과 한인간담회에서 극장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자기 문화와 뿌리를 모르는 고려인 젊은이가 늘고 있어 이들에게 민족문화를 보여주고 자긍심을 심어줄 공간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공식 건의한 것이다.
이후 정상회담에서 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카리모프 대통령은 ‘고려인 문화예술회관을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토지를 제공하고 한국 정부가 건축비용을 대는 방식으로 극장을 건립하기로 합의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타슈켄트 시내 중심가에 9천 평의 땅을 즉시 내놨고,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도 2개월 전 현장 답사를 마치는 등 극장 건립은 가속하고 있다.
”전용 극장이 생긴다는 소식에 매일 고려인들이 ‘언제 짓느냐?’고 물어봐요. 여기 사는 20만 고려인의 숙원사업이니 왜 궁금하지 않겠어요. 어쨌든 극장이 들어서면 고려인역사박물관도 만들어 후손이 자신의 역사를 잘 알도록 할 겁니다. 또 우리 전통문화 공연과 학습, 한국어 교실 등도 열 계획이고요. 제가 꼼꼼히 챙겨 임기 내 완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양국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하던 그에게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강제 이주 역사를 들려달라고 하자 잠시 머뭇하더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시아 연해주 수찬 지역에서 한의사이면서 말 농장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1937년 추수가 끝난 10월 중순 갑자기 러시아 군·경이 들이닥쳐 강제로 화물열차에 태웠고, 영문도 모른 채 28일간 밤낮으로 달려 낯선 땅 타슈켄트에 버려졌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며 열차로 이동했어요. 아버지 3형제 중 막내가 죽었는데 묻을 시간도 주지 않아 철로변에 내려놓고 왔데요. 살던 터전에서 내몰려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버려졌던 고려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어려서 들은 이야기인데도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각인돼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누울 곳이 없어 토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나는 고려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가족을 집으로 데려와 겨울을 나도록 했다는 증언은 박 의원이 ‘우정의 조형물’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박 의원은 우즈베키스탄 현지인이 따듯한 사람이란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자신의 성장이야기도 들려줬다.
”집단 농장에서 태어나 2개월도 안 돼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갓난 저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떠나자 처지를 불쌍히 여긴 이웃집 산모가 젖을 먹여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생면부지인 저에게 젖을 나눠주고 친자식과 형제처럼 크도록 도와줘서 은혜에 감사해 양어머니처럼 모셨고 지금도 가족과 형제처럼 지냅니다.”
그는 이후로도 입대 후 힘들다던 잠수함으로 배치받게 될 것을 면하게 해준 우즈베크인, 공무원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부사장까지 오르고 독립해 사업에 성공하기까지의 도움을 줬던 많은 사람,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고마운 일들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구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유학했으나 도중에 입대했고 제대 후 결혼으로 가장이 되자 복학을 포기하고 주물 공장에 취직했다. 남다른 근면함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공장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국영 변압기 공장으로 스카우트돼 부사장까지 오른 뒤 정부 산업부 전기관련 부서장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당시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온 개혁 개방의 물결에 이어 1991년 소련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자기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건축회사인 ‘오카르다이스’(안전을 보증한다는 의미)를 차렸다.
이전부터 경영과 관리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건설 중장비 50대와 2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견 건설회사로 키웠다.
1990년대 그의 회사는 우즈베키스탄 곳곳에서 대형 방직 공장을 25개 건설하는 실적을 올리며 공장 건설분야 선두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직장인과 기업인을 거쳐 그의 인생 3막은 고려인문화협회 일을 보면서 시작됐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고려인 행사에는 빠짐없이 후원해온 그를 2012년 고려인문화협회 원로들이 회장으로 초빙하자 ‘이제부터는 봉사 인생을 살겠다’며 수락했다.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준 그는 협회 활동에 매달렸다. 대외적인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현지 경제인단체에도 가입했는데, 그곳 추천을 받아 지난해 선거에 출마했던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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